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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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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시게오는 일본의 야구 선수, 지도자, 구단 경영인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내야수로 활약했으며, 1930년에는 주장을 맡았다. 1935년에는 마쓰야마 상업학교의 벤치 코치로 하계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오사카 타이거스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1937년부터는 고라쿠엔 이글스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고,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으로 9번의 우승을 달성하며 황금기를 이끌었다. 다이요 웨일스 감독 겸 사장과 구단 대표를 거쳐, 가와사키 구장 사장을 지냈으며, 1977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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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시게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수 이름모리 시게오
원어 이름Shigeo Mori
일본어 이름森 茂雄
로마자 표기Mori Shigeo
가나もり しげお
한자森 茂雄
출생지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생년월일1906년 3월 18일
사망일1977년 6월 24일
국적일본
신장170
체중75
수비 위치내야수
투구
타석
선수 경력
아마추어 경력도쿄 클럽
애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 고등학교 (구제)
와세다 대학 야구부 (구제)
프로 입단 연도1937년
드래프트 순위해당 사항 없음
첫 출장1937년
마지막 경기1938년
소속 구단고라쿠엔 이글스/이글스 (1937 ~ 1939)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 및 코치 경력오사카 타이거스 (1936)
고라쿠엔 이글스/이글스 (1937 ~ 1939)
도쿄 제국대학
와세다 대학
다이요 웨일스 (1959)
수상
선출국일본
선출년도1977년
득표율해당 사항 없음
선출 방법특별 헌액
기타 정보
곤도 효타로와 모리 시게오
곤도 효타로(왼쪽)와 모리 시게오(오른쪽),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타이완 원정 시 촬영

2. 선수 경력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와 와세다 대학 시절에는 내야수로 활약했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회인 야구 클럽팀인 도쿄 클럽에서도 선수로 뛰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7][2] 프로 야구에서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고라쿠엔 이글스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맡으며, 선수로서는 대타로 4경기에 출전한 기록이 있다.

2. 1. 마쓰야마 상업학교 시절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 시절에는 내야수였다.

2. 2. 와세다 대학 시절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 시절 내야수였으며, 이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뛰어난 타격과 수비를 겸비한 내야수로 활약했다. 1930년에는 주장을 맡았고, 그 해 감독이 부재중일 때 감독 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리그 통산 93경기에 출전하여 315타수 78안타, 타율 .248, 41타점을 기록했다.

2. 3. 도쿄 클럽 시절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에 입사했다.[7][2] 회사 업무 외에도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추천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심판을 맡았고,[7][2] 또한 클럽팀인 도쿄 클럽의 선수로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하여 2번의 우승에 기여했다.[7][2]

2. 4. 프로 야구 선수 경력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와 와세다 대학에서 내야수로 활약했으며, 와세다 대학 시절인 1930년에는 주장을 맡아 감독 대행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학 리그 통산 93경기에 출전해 타율 .248, 41타점을 기록했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 세이분도신코샤에 입사했고[7], 업무 외 시간에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과 클럽 야구팀 도쿄 클럽 선수로 활동하며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1931년, 1933년)에 기여했다.[7][2] 또한 1935년에는 모교인 마쓰야마 상업의 코치(감독)로서 하계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1]

회사를 그만두고 쉬던 중[7][2], 와세다 대학 야구부 부장이었던 아베 이소오의 강력한 권유로 1935년 창단한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등번호는 '''25'''번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6년 7월 29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모회사 한신 전기 철도의 라이벌 기업 한신 급행 전철 산하 구단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대패한 것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당시 모리는 프로 야구계 투신을 망설이고 있었고, 한신과의 계약이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 약속이었던 점도 해임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7][2]

1937년에는 새로 창단된 고라쿠엔 이글스(이후 다이와 군)와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하여 1939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감독 재임 중 선수로서 대타로 4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 코치로 초빙되어 팀을 리그 2위로 이끌었는데, 이는 도쿄 제국대학 역사상 최초의 성과였다. 1947년 가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아, 21시즌 동안 9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재임 기간과 우승 횟수 모두 와세다 대학 역대 감독 중 1위이며, 9회의 우승 기록은 메이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시마오카 키치로 감독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이 시기 히로오카 다쓰로, 고모리 미쓰오 등 여러 뛰어난 선수들을 육성했으며[1][3], 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구단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초 사장직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이던 후배 미하라 오사무를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려던 계획이 호치 신문의 특종 보도로 니시테쓰 측에 알려지면서 무산되자, 직접 감독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6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던 팀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아오타 노보루 등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하고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재편했다. 또한 패배주의에 젖은 팀 분위기를 쇄신하고 미하라가 신뢰하던 도이 아쓰시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다음 해 미하라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4]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구단 대표를 역임했으며, 특히 1960년에는 미하라 오사무 감독 체제 하에서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팀의 홈 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지냈다.[1] 다이요 구단에서는 사장과 대표로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구단 발전에 공헌했다.[1] 한편, 1972년 3월 12일에는 요미우리 OB회를 본떠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에 참여했다.[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3. 지도자 경력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에 입사하여 근무하는 한편[2],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추천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심판을 맡았고[2], 클럽팀 도쿄 클럽의 선수로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해 2번의 우승에 기여했다.[2]

회사를 퇴사한 후[2], 1935년 아베 이소오의 권유로 새로 창단된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으나[2] 이듬해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는 신생팀 고라쿠엔 이글스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 코치를 맡아 팀을 리그 2위로 이끌었으며[1], 1947년 가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9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히로오카 다쓰로 등 여러 선수들을 지도했다.[1][3]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으로 프로야구계에 복귀했다. 1년간 감독을 맡아 팀 재건의 기초를 다진 뒤[4], 1960년부터 1972년까지는 구단 대표를,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홈구장인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역임하며 구단 운영에 기여했다.[1] 또한 1972년에는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에도 관여했다.[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3. 1. 오사카 타이거스 감독 시절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를 퇴사하고 쉬던 중[2], 와세다 대학 야구부 창설에 기여한 아베 이소오의 강한 권유를 받아 1935년 새로 창단된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등번호는 '''25'''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6년 7월 29일 갑작스럽게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해임 직전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모회사 한신 전기 철도의 당시 라이벌 기업이었던 한신 급행 전철 (현 한큐 한신 홀딩스)의 구단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크게 패배한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모리 본인이 프로 야구계에 투신하는 것을 망설였고, 이 때문에 한신과의 계약이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 약속 형태로 이루어졌던 점도 해임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

3. 2. 고라쿠엔 이글스 감독 시절

1937년, 새로 창단된 고라쿠엔 이글스의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했다. 1939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이 기간 동안 직접 대타로 4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3. 3.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 코치 시절

1946년에 초청을 받아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의 코치를 맡아, 팀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2위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1]

3. 4.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 시절

1946년에는 요청을 받아 도쿄 제국 대학 야구부의 코치를 맡아, 도쿄 제국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2위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47년 가을부터 1957년까지는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감독을 맡았다. 재임 기간 21시즌 동안 9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기를 열었다. 재임 기간과 우승 횟수 모두 와세다 대학 야구부 역대 감독 중 1위에 해당하며, 9회의 우승 기록은 메이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시마오카 키치로 감독에 이어 리그 역대 2위 기록이다. 이 시기 이시이 도키치로, 스에 요시 도시노부, 히로오카 다쓰로 등 여러 선수들을 육성했다.[1] 특히 3루수였던 히로오카 다쓰로를 유격수로 기용하여 고모리 미쓰오와의 3-유간 콤비는 와세다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주장이었던 고모리는 좋은 조건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했으며, 히로오카는 훗날 모리 시게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회고했다.[3] 모리 시게오는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와세다 대학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3. 5. 다이요 웨일스 감독 겸 사장 시절

1959년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이 되었다. 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감독이었던 후배 미하라 오사무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구단 사장직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미하라 영입 계획이 호치 신문의 특종 보도로 니시테쓰 측에 알려지면서 무산되자 감독까지 겸임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으로서는 1년 동안 팀을 이끌었다. 당시 다이요는 6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리는 다음 해 감독으로 부임할 미하라 오사무의 구상에 맞춰 팀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아오타 노보루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하여 팀을 젊은 선수 위주로 재편했으며, 팀에 만연했던 패배 의식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 또한 미하라가 신뢰하는 도이 아쓰시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미하라가 팀을 이끌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힘썼다.[4]

1960년부터 1972년까지는 다이요 웨일스의 구단 대표를 맡았다. 대표로 있던 1960년에는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지휘 아래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구단의 홈 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지냈다.[1] 모리는 다이요 웨일스에서 구단 사장과 대표로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다이요 구단 대표로 재직하던 중인 1972년 3월 12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를 모델로 하여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를 창립하기도 했다.[5]

4. 경영인 경력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에 입사했다.[7][2] 회사 업무 외에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추천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심판을 맡았고,[7][2] 클럽팀 도쿄 클럽의 선수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해 2번의 우승에 기여했다.[7][2]

회사를 퇴사하고 쉬던 중,[7][2] 아베 이소오의 강한 권유로 1935년 새로 창단된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등번호는 '''25'''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6년 7월 29일 갑자기 해임되었는데, 이는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전기 철도의 라이벌 기업 구단인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대패한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모리는 프로 야구계 투신을 망설여 한신과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 약속만 한 상태였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7][2]

1937년에는 새로 창단된 고라쿠엔 이글스와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하여 1939년까지 팀을 이끌었으며, 직접 대타로 네 차례 출장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의 코치로 초빙되어 팀을 사상 첫 리그 2위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1947년 가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감독을 맡아, 21시즌 동안 9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과 우승 횟수 모두 와세다 대학 역대 감독 중 1위이며, 9회의 우승 기록은 메이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시마오카 키치로 감독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이시이 도키치로, 스에 요시 도시노부, 히로오카 다쓰로 등 많은 선수를 육성했으며,[1] 대학 강사를 겸임하기도 했다.[3]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60년부터 1972년까지 구단 대표를,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가와사키 구장 사장을 역임하는 등 구단 경영에 참여했다.[1][4][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4. 1. 다이요 웨일스 구단 대표 시절

1959년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이 되었다. 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이었던 후배 미하라 오사무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구단 사장직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미하라 영입 계획이 스포츠 호치의 특종 보도로 니시테쓰 측에 알려지면서 무산되자 감독까지 겸임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모리가 감독을 맡았을 때 팀은 6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감독으로 부임할 미하라 오사무의 구상에 맞춰 팀 개혁을 단행했다. 아오타 노보루 등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고 젊은 선수 중심으로 팀을 재편했으며, 팀 내 패배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미하라가 신뢰하던 도이 아쓰시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1년 동안 미하라가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4]

이듬해인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구단 대표를 역임했다. 1960년에는 미하라 감독의 지휘 아래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를 달성했다. 그 사이 1972년 3월 12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를 본떠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를 창립하기도 했다.[5] 이후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구단의 홈 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지냈다.[1] 모리는 다이요 웨일스에서 구단 사장과 대표로서 오랜 기간 재직하며 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2. 가와사키 구장 사장 시절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다이요 웨일스 구단의 홈 구장이기도 한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역임했다.[1]

4. 3.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

1972년 3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를 모델로 삼아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를 창립했다.[5]

5. 사망 및 명예의 전당 헌액

1977년 2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같은 해 6월 24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상세 정보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와 와세다 대학에서 내야수로 활동했으며, 와세다 대학 시절에는 주장을 맡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인쇄 회사 근무와 병행하여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 및 클럽팀 도쿄 클럽 선수로 활동하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7][2]

1935년 아베 이소오의 권유로 신생팀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으나,[7][2] 이듬해 해임되었다.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고라쿠엔 이글스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지냈다.

194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 코치를 맡아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인 리그 2위 달성에 기여했고, 1947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으로서 9차례 리그 우승을 이끌며 황금기를 구축했다.[1] 이 시기 대학 강사도 겸임했다.

1959년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으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1960년부터 1972년까지 구단 대표를 역임하며 팀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홈구장 가와사키 구장 사장을 지내는 등 구단 경영에 깊이 관여했다.[1] 1972년에는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에도 참여했다.[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6. 1. 출신 학교


  • 구제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
  • 구제 와세다 대학

6. 2. 선수 경력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 시절에는 내야수였고, 이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뛰어난 타격과 수비를 갖춘 내야수로 활약했다. 1930년에는 주장을 맡았으며, 감독 부재 시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리그 통산 93경기에 출전하여 315타수 78안타, 타율 .248, 41타점을 기록했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 1935년에는 모교인 마쓰야마 상업의 벤치 코치(사실상 감독)로서 하계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1] 이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에 입사했다.[7][2] 회사 업무 외에도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추천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심판을 맡았고,[7][2] 클럽 야구팀 도쿄 클럽의 선수로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하여 2번의 우승에 기여했다.[7][2]

회사를 퇴사하고 쉬던 중,[7][2] 와세다 대학 야구부 부장이었던 아베 이소오의 강력한 권유로 1935년 새로 창단된 한신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등번호는 '''25'''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6년 7월 29일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이는 직전에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모회사 한신 전기 철도의 라이벌 기업인 한신 급행 전철의 구단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대패한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모리는 프로 야구계 투신을 망설여 한신과 구두 계약만 맺고 정식 계약이 없었던 점이 해임의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7][2]

1937년 창단한 고라쿠엔 이글스(후의 이글스)와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했으며, 1939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직접 대타로 네 차례 출장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요청을 받아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의 코치를 맡아, 팀을 리그 2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는데, 이는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 역사상 최초의 성과였다. 1947년 가을 시즌부터 1957년까지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아, 재임 21시즌 동안 9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과 우승 횟수 모두 와세다 대학 야구부 역대 감독 중 1위이며, 9회의 우승은 메이지 대학의 시마오카 키치로에 이어 리그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이시이 도키치로, 스에 요시 도시노부, 히로오카 다쓰로 등 많은 선수를 육성했다.[1] 특히 3루수였던 히로오카를 유격수로 기용하여 고모리 미쓰오와 히로오카의 3-유간 수비는 와세다의 명물이 되었다.[3] 이 시기 와세다 대학 강사를 겸임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이 되었다. 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이었던 후배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이 계획이 스포츠 호치의 특종 보도로 니시테쓰 측에 알려지면서 무산되자 직접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6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팀을 맡아, 이듬해 감독으로 부임할 미하라의 구상에 따라 대대적인 팀 개혁을 단행했다. 아오타 노보루 등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하고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재편했으며, 패배주의를 없애고 미하라가 신뢰하는 도이 아쓰시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1년 동안 미하라가 팀을 이끌 기반을 마련했다.[4]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1960년 미하라 감독 체제 하에서 구단 사상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팀의 홈 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지냈다.[1] 다이요에서는 구단 사장 및 대표로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구단 발전에 기여했다.[1]

한편, 1972년 3월 12일에는 요미우리 OB회를 본떠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에 참여했다.[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6. 3. 지도자·기타 경력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인쇄 회사인 세이분도에 입사했다.[7][2] 회사 업무 외에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추천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을 맡았고,[7][2] 클럽팀인 도쿄 클럽 선수로도 활동하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해 2번의 우승에 기여했다.[7][2] 또한, 1935년에는 모교인 마쓰야마 상업학교의 벤치 코치(사실상 감독)로서 하계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1]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7][2], 와세다 대학 총장이었던 아베 이소오의 강력한 권유로 1935년 새로 창단된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등번호는 '''25'''번이었다. 그러나 프로 야구계에 투신하는 것을 망설여 한신과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 약속만 한 상태였는데,[2] 이듬해인 1936년 7월 29일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해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모회사 한신 전기 철도의 라이벌 기업 한신 급행 전철의 구단인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대패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7][2]

1937년에는 새로 창단된 고라쿠엔 이글스와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하여 1939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직접 대타로 4경기에 출장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요청을 받아 도쿄 제국대학 야구부의 코치를 맡아, 팀을 리그 2위로 이끌었는데, 이는 해당 대학 야구부 역사상 최초의 성과였다. 1947년 가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재임 기간 21시즌 동안 9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재임 기간과 우승 횟수 모두 와세다 대학 야구부 역대 감독 중 1위이며, 9번의 우승은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역사상 메이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시마오카 키치로 감독에 이어 2위에 해당한다. 이 시기 이시이 도키치로, 스에 요시 도시노부, 히로오카 다쓰로 등 많은 우수 선수를 육성했으며,[1] 특히 3루수였던 히로오카를 유격수로 기용하여 고모리 미쓰오와 히로오카의 3-유간 수비는 와세다의 명물로 꼽혔다. 주장이었던 고모리는 좋은 조건으로 마이니치에 입단했고, 히로오카는 모리가 훗날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술회했다.[3] 이 기간 동안 와세다 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구단 사장으로 취임했다. 원래는 사장직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이었던 후배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영입하려던 계획이 호치 신문의 특종 보도로 니시테쓰 측에 알려지면서 무산되자, 직접 감독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다이요는 6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리는 다음 해 감독으로 부임할 미하라를 위해 팀 개혁을 단행했다. 아오타 노보루를 포함한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하고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재편했으며, 패배 의식에 젖어있던 팀 분위기를 쇄신했다. 또한 미하라가 신뢰하던 도이 아쓰시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등, 1년 동안 미하라가 팀을 이끌 기반을 마련했다.[4]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구단 대표를 역임했다. 대표로 있던 1960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 체제 하에서 구단 사상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구단 사장 및 대표로서 오랜 기간 재직하며 구단 발전에 공헌했다.[1]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다이요 웨일스의 홈구장이었던 가와사키 구장의 사장을 지냈다.[1] 1972년 3월 12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를 모델로 하여 마쓰키 겐지로를 회장, 후지무라 후미오를 부회장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OB회' 창립에도 참여했다.[5]

1977년 6월 2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

6. 4. 수상·타이틀 경력


  • 야구 명예의 전당 특별 표창 (1977년)[6]

6. 5.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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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사용 연도소속팀
251936년오사카 타이거스
301937년 ~ 1939년고라쿠엔 이글스
1959년다이요 웨일스


6. 6. 연도별 타격 성적


도소

속경









2

3











자희







4












O
P
S
1937년 추계이글스11100000000--0--0--00--.000.000.000.0001938년 춘계11100000000--0--0--00--.000.000.000.0001938년 추계22200000000--0--0--01--.000.000.000.000통산 : 2년44400000000--0--0--01--.000.000.000.000


6. 7.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오사카 타이거스의 초대 감독으로 1935년에 부임했지만, 이듬해인 1936년 7월 29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큐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크게 패한 후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7] 당시 모리는 프로 야구계 투신을 망설여 한신과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 약속 상태였던 점이 해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7]

1937년에는 새로 창단된 고라쿠엔 이글스와 선수 겸임 감독으로 계약하여 1939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감독 재임 중 직접 대타로 네 차례 출장하기도 했다.

1947년 추계 시즌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총 21시즌을 지휘하며 9차례의 리그 우승을 달성,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이는 와세다 대학 감독 중 역대 최장 임기 및 최다 우승 기록이다. (리그 전체에서는 메이지 대학의 시마오카 기치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우승 횟수이다.)

1959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 겸 사장으로 부임했다. 원래는 사장직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영입하려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니시테쓰 라이온스 잔류가 스포츠 호치의 특종 보도로 무산되면서 감독직을 겸하게 되었다.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421경기 출전, 160승 246패 15무, 승률 .394이다.

참조

[1] 서적 野球殿堂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野球体育博物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2] 서적 一球無二-わが人生の神宮球場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78
[3] 간행물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産経新聞出版 2015
[4] 서적 4522敗の記憶 ホエールズ&ベイスターズ涙の球団史 (双葉文庫) 文庫 双葉文庫
[5] 뉴스 日刊スポーツ 2023-11-27
[6] 뉴스 <3>森茂雄 松山商1935年夏優勝 「常に温顔」で夏初制覇 https://www.ehime-np[...] 愛媛新聞ONLINE 2018-05-31
[7] 서적 일구무이 - 우리 인생의 진구 구장 베이스볼 매거진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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